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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uuuuuusic/한국음악사

[증보 한국음악통사 요약] 서장 - 한국음악사의 새로운 인식 / 2절 - 한국음악사의 새로운 시대구분

by 시리얼헌터 2020.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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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표시 안의 이텔릭체 글은 블로그 글쓴이의 뇌피셜 주석임, 또한 요약하는 과정에서 저자의 의도를 해석하고 분류하여 원 글의 순서를 재정비하기도 했음을 밝힙니다***




▶시대 구분의 관점들

 

  한국음악사는 우리 음악인과 수용자들이 이루어 놓은 음악활동의 결과물이다. 이는 여러 관점에서 논의될 수 있다.

--음악수용층의 관점 : 어느 사회계층이 주도적으로 전개시키고 향수하였는가?

--외래음악 수용사의 관점 : 시대에 따라 어떤 외래음악을 어떻게 수용하였는가?

 

 

 

▶시대 구분 용어의 문제

 

  기존 개론서에서는 왕조명을 시대구분의 용어로 사용하는데, 이는 정치사 위주의 시대구분이기 때문에 음악 문화를 거시적으로 파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본 저서에서는 한국음악사의 시대구분을 고대-중세-근대의 세 시기로 나누고자 한다. 이는 유럽 역사 이론의 용어를 빌린 것인데, 그 용어의 탄생 배경인 유럽 역사의 발전단계를 그대로 한국음악사에 적용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용어는 빌리되, 그 기준은 새롭게 정립할 것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대 : (1) 첫째시대 : 기원전 ~ 삼국시대

          (2) 둘째시대 : 남북국시대

 

중세 : (3) 셋째시대 : 고려

          (4) 넷째시대 : 조선전기

 

근대로의 전환기 : (5) 다섯째시대 : 양란(임진,병자) ~ 개항 이전

 

근현대 : (6) 여섯째시대 : 개항 이후 ~ 일제강점기

             (7) 일곱째시대 : 광복 이후 ~ 현재 (출판년도 2007시점으로 20세기 말까지를 의미)


 

 

  시대 구분의 근거가 되는 각 시대의 시대별 특징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하겠다.

 


 

고대



(1) 첫째시대 : 향악의 형성과 발전 시대 (원시~삼국)

원시 공동체 사회 : 제천의식에서 악가무를 포함하는 종합 예술 형태의 공연이 행해짐

고대국가 :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의 분리 -> 왕족과 귀족층의 등장 = 지배계층 중심으로 음악수용층이 변화

전문음악인 왕립음악기관 등장 : 우륵(가야, 가야금 등), 왕산악(고려, 거문고), 음성서(신라 왕립 음악 기관)

외래악기 수용 : 고구려는 중국 북조에서, 백제는 중국 남조에서 외래악기를 수용, 기원 전 음악과는 다른 음악문화를 형성하였다.

향악의 전파 : 고구려는 수나라와 당나라에 자국의 악사를 파견하여 공연하였고, 백제, 고구려, 신라의 악사와 악생들이 각각 구다라가쿠, 고마가쿠, 시라기가쿠라는 이름으로 고대 일본조정에 삼국의 음악을 전파하였다. 이는 삼국의 향악(향토음악)의 기반이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지 않으면 불가한 일이었다.



(2) 둘째시대 : 향악의 전성시대 (남북국)

남북국 시대 : 발해와 통일신라가 대치하던 시기

신라 조정을 통해 당악기와 당악조가 수입되어 새 음악문화를 만들었다 ([[삼국사기]]의 [악지]에 당비파, 당피리, 박판 등 당악기 소개됨 / 황종조, 반섭조, 월조와 같은 당악조가 향악기에 사용됨) 하지만 여전히 향악이 절대적으로 우세함

범패의 등장 : 범패는 불교 음악으로, 당풍 범패가 수입되었다.

전문 연주가와 창작곡의 출현 : 고구려 옥보고의 거문고 창작곡 연주

악사의 사회적 지위가 높음 : 왕산악(거문고 제작자)은 고구려 재상, 우륵의 제자, 옥보고의 제자는 신라 귀족이거나 왕족 출신이었고, 예를 다해 음악 스승을 모셨다.

삼현삼죽 : 통일 신라의 향악에 사용된 주요 악기이며, 삼현은 가야금, 거문고, 비파 / 삼죽은 대금, 중금, 소금이다. 이 중 가야금은 가야국 멸망 시 우륵이 신라로 망명하여 전한 것이고, 나머지 악기들은 삼국통일 이후 백제, 고구려로부터 수용하여 새롭게 발전 시킨 것이다.




중세


(3) 셋째시대 : 당악, 아악의 수용 시대 (고려)

고대 후기(통일 신라 시기)부터 당악이 차츰 뿌리를 내리고 있었는데, 12세기 고려조정에 송나라의 교방악이 소개됨과 더불어 ‘당악’은 ‘향악’에 대응되는 음악의 주요 갈래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고려왕립기관인 대악서와 관현방에 당악 악사가 소속되어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다.

당악정재(포구락, 오양선, 헌선도, 수연장, 연화대)는 향악정재(동동, 무애, 무고 등)의 생성에 영향을 끼쳤다.

김여영과 김득우는 교방악사의 대표적인 후예다. 당악의 위치를 향악과 대등하게 만든 인물.

대성아악 역시 12세기에 고려에 소개됨. 신흥사대부라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하였고, 그들은 예악 사상에 입각한 음악인 아악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외래 음악 수용 역사는 중국의 왕조사와 함께 한다. 중국 대륙에서는 여러 국가가 흥망성쇠의 길을 걸었다. 여러 나라들이 있었지만, 영토와 세력상으로 굵직한 나라들만 언급하면, 중국의 역사는 상(은)나라-주나라-춘추전국시대-진나라-한나라-위진남북조 시기-수나라-당나라-오대십국시대-송나라-원나라-명나라-청나라 순으로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당악’은 문자 그대로는 ‘당나라의 음악’이라는 뜻이지만, 당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중국의 음악’이라는 넓은 의미의 명칭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송나라의 교방악도 ‘당악’의 갈래에 속하게 된다. 왕조가 바뀌었음에도 ‘당악’이라는 명칭을 계속 유지하는 이유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당나라가 중국의 다른 왕조에 비해 비교적 긴시간 동안 부국 강병을 이룬 나라이기 때문에 중국 본토 = 당이라는 연상적 사고가 깊게 뿌리 박혀 있었을 것이다. ‘당악’이라는 용어가 정확히 언제 생겨난지는 알 수 없으나, 통일 신라의 건국 과정에서 당나라가 밀접하게 연관되었고, 그 때부터 문화적 교류가 많았다고 보면, 몇 백년 동안 ‘당악’이라는 용어가 ‘중국 본토 음악’이라는 뜻으로 쓰였을 것이다. 이러한 관습을 왕조가 바뀌었다고 해서 쉽게 바꾸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중국의 역사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위키백과를 참조. 중국의 역사 : 위키백과 ***



(4) 넷째 시대 : 아악의 정비 시대 (조선 전기)

신흥사대부가 조선왕조를 건국하면서 아악을 궁중음악의 주요 갈래로 정비하였다. 왕립음악기관인 좌방에서 아악을 담당하게 되었다.
한편 원래 좌방 소속이던 당악은 향악과 함께 우방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이로써 궁중음악의 아악, 당악, 향악의 세 갈래가 되었으나, 넷째시대가 계속 전개 되며 당악은 점차 향악화가 되었다.
그 이유로는 첫째로, 송나라 멸망 이후 송나라로부터 교방악사의 파견이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둘째로, 우방에 소속된 악공들이 향악과 당악을 함께 연주하였기 때문이다.
당악의 향악화 사례는 [악학궤범]에 전하는 당악기에서 발견되는데, 15세기의 당악기 중에서 월금, 해금은 당악 연주에 사용되지 않았고 향악 연주에만 사용 되었다. 박, 교방고, 장고, 당비파, 아쟁, 태평소는 향악 및 당악연주에 모두 사용 되었다.

새 기보법의 등장은 중세후기 음악사의 획기적인 사건이다. 중세전기에도 이미 기보법이 존재하였지만, 세종조에는 동양 최고(옛 고)의 유량악보인 ‘정간보’가 창안되어 음가를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세조(1455~1468)조에 창안된 오음약보 및 성종(1469~1494)조에 창안된 합자보와 같은 기보법은 정간보와 함께 고려 향악과 조선 초기 신악 등 여러 악곡을 후대에 남기는데 공헌하였다.

음악 수용층은 중세에서도 왕족과 정치적 지배세력인 귀족층이었으므로 그 양상이 고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악사의 사회적 지위가 고대에 비해 낮아졌다. 중세전기부터 점차 궁중음악인의 지위가 낮아지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궁중음악인을 천민 중에 선출하기 시작하였다. 음악갈래에 따라 악사의 사회적 지위가 다르기도 하였는데, 좌방(아악을 연주)에 속하는 악사인 ‘악생’은 양인 중에 선출하였고 우방(당악, 향악을 연주에 속하는 악사인 ‘악공’은 천민 중에 선출하였다. 

***음악의 수용층이 계속하여 지배계층에 머무른 이유는 우선적으로 악기의 제작 과정이 어렵고 비용이 드는 일이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민중에서 악기를 소유하여 음악 활동을 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또한 음악 활동을 즐기려면, 악기를 수련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고, 음악 활동을 할 만한 장소와 여건이 마련되어야 하는데, 이는 생업이 바쁘지 않고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지배계층에서 감당할 수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는 현대에서도 마찬가지다. 경기가 안좋아지면 시민들의 문화 비용은 낮아지고, 대학에서 문화 예술 관련 학과 전공생, 지망생이 줄어든다. 또한 문화 예술계 산업의 전체 파이가 줄어드는 현상이 생겨난다. 현재는 악기 제작이 공장화 되어 구입 비용이 낮아졌기 때문에 일반 시민들도 취미로 한 두개의 악기를 구매하여 연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악기의 비용이 높았던 과거에는 그럴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집이 많지 않았고, 예중 예고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부유한 집안의 자제가 많았다. 특히 컴퓨터 음악은 초기 투자 비용이 매우 높다. 실제 악기 뿐만 아니라 좋은 품질의 신디 사이저, 컴퓨터, 마이크 , 녹음기, 이펙터등 음향장비를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기술 발달로 이 또한 가격이 낮아져 진입 장벽이 많이 낮아졌지만, 우리나라 초기 컴퓨터 음악 작곡가들은 (80~90년대) 부유한 집안의 자제들이 취미로 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음악은 인간의 본능과도 같은 것으로, 민중에서도 어떠한 형태로든 음악적 활동과 유희는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에 관한 사료가 많이 남아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 책을 요약하며 관련 내용을 공부 할 수 있길 기대한다...***

 

 

 


근대로의 전환기 

 

 

(5) 다섯째 시대 : 근대로 전환기의 민간음악시대 (양난 이후~개항 이전)

 

양난으로 인한 궁중악사와 악기 소실 -> 궁중음악의 쇠퇴 

 

유가적 음악이념을 옹호하려는 양반층의 노력이 강화되었으나,(e.g.정조가 경록무강지곡 등 새로운 제례악 작곡) 시대의 변천을 막을 수는 없었다.

 

실학사상의 대두 또한 조선 사회의 흐름을 바꾼 중요한 요인이었고 이는 음악에도 영향을 미친다. 궁중 밖 선비와 중인 출신에 의해 풍류음악이 성행하였고, 광대, 사당패 등 다양한 민간음악 집단들이 시정(시장)을 중심으로 활동하여 판소리, 잡가, 풍물놀이 등 다양한 민간음악이 생겨났다.

 

음악양식의 변화로는, 중세후기 넷째시대의 성악곡이 이 시기에 기악곡으로 변천되었고, 기존의 악곡으로부터 악현축소, 고음화, 장단변화 등의 방법으로 변주곡들이 파생되었다. 이는 연주자들에 의한 것이었지 현대적 의미의 작곡가에 의한 창작품은 아니었다. 

 

궁중음악은 그 악현이 축소되어 관현악기 편성에서 관악기 중심 편성으로 변화하였다.  

 

 


 

근현대

 

 

(6) 여섯째 시대 : 서양음악의 수용시대 (개항 이후~일제강점기)

 

***교육기관의 다양화***

 

이 시기의 전문음악교육기관은 1911년에 설립된 조선정악전습소와 1925년에 개교된 이화여자전문학교의 음악과가 있었고, 궁중의 장악원을 계승한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가 있었다. 그 외 민간의 사설 교육기관 또한 존재 하였는데, 단체의 성격에 따라 교육하는 음악 장르가 달랐다. 

 

 

----양악 교육 :

 19세기 말부터 기독교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나 구한말의 신식 교육체제 아래서 양악 교육이 이루어졌다.

 

서양화성법으로 작곡된 찬송가, 창가나 동요같은 새 성악갈래가 출현, 중요한 갈래가 되었다. 특히 황국신민화 정책에 따른 조선총독부의 음악정책( = 창가(일본 노래)를 널리 알리고, 전통음악은 음악교육에서 청저히 배제 시킴)은 신세대들에게 서구지향적 음악관을 심어주었다.([보통교육창가집] by 조선총독부)

 

 1901년에는 서양식 군악대인 양악대가 등장하여 국가의 주요 행사에 양악을 연주하였다. (Franz Eckert가 창설/명성황후 장례식에서 장송곡)

 

서양음악의 기악분야에서 연주활동을 전개한 단체로 최초의 관현악단은 1926년 창립된 중앙악우회이다. 그 후 여러 관현악단이 설립되었으며 이들이 한 공연 활동을 통해 일반 시민이 양악 수용층으로 확대되었다. 

 

 

 

----전통음악 교육 :

궁중음악은 장악원의 세습제를 타파하였고 1913년부터 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에서 시민층의 자제를 뽑아 교육시켰다. 교육의 주요 장르는 궁중악(아악, 당악, 향악)과 풍류방의 기악음악, 가곡, 가사 등이었다.

 

판소리나 산조, 민요나 잡가 등의 민간음악은 장악원 출신 혹은 풍류방 출신의 교육자들로부터 하대를 받아, 근대 교육기관에 뿌리를 내릴 수 없었다. 그 일부만이 비제도권의 권번에서 전승되었다. 판소리는 조선성악연구회를 통해 교육되었다. 

 

 

 

***미디어의 출현 ***

 

1) 극장 : 1900년대 초에 왕립극장 협률사와 원각사 및 사설극장 (광무대, 연흥사, 단성사, 장안사)이 출현하였다. 음악수용층의 확대에 기여하였고, 판소리의 근대식 공연물인 창극 탄생의 배경이 되었다. 판소리와 잡가, 가곡 등은 공연물로 굉장한 인기가 있었다. 

2) 유성기 음반

3) 방송 (경성방송국) : 라디오를 통해 음악 향유

 

--->미디어의 출현으로 음악 향유에 있어 시공간적 제약이 적어졌고 결과적으로 음악 수용층이 넓어지게 됨

신민요나 유행가를 중심으로 대중음악이라는 음악문화가 만들어짐

 

 

이와 같은 양악 지향적인 구한 말의 교육 환경에서 전통음악은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었으며, 근대음악사의 당면과제였던 민족음악의 모색에 실패하게 되었다.

 

 

 

 

 

 

(7) 일곱째 시대 : 민족음악의 모색시대 (광복 이후~현재)

 

분단시기의 현대음악사에서 북한은 사회주의 정치체제 하에서 사실주의에 입각한 음악문화를 형성, 남한은 민주주의 정치체제 하에 다양한 형태의 음악문화를 형성하였다.

 

북한의 음악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는 그림자가 있지만, 민족음악의 형식과 내용면에서 음악의 시대적 과제였던 민족음악을 모색하려는 노력의 흔적이 보인다.(전통악기의 개량사업, 양악관현악과 전통악기의 배합관현악 시도, 혁명가극과 같은 종합 공연물 등)

 

남한 사회에서는 제도권에서 양악과 국악이 양분되었고, 비제도권에서는 대중음악이 별개로 성장하였다. (여기에서 '제도권'이란 국가에 의한 전문 음악교육기관을 말하는 듯하다.) 초창기 전문음악교육기관에는 국악 및 대중음악을 수용할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아, 남한의 음악사회는 여섯째시대의 흐름을 이어받아 양악을 중심으로 형성 되었다. 이는 20세기 근대화과정에서 전통음악의 창조적 계승과 서양음악의 자주적 수용을 맡았던 음악 엘리트가 시대적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결과에서 비롯되었다. 그나마 궁중음악은 국립국악원을 통해서 전승되었으나, 민간음악은 비제도권의 명인명창들에 의해서 어렵사리 명맥을 유지, 대중음악은 매스미디어를 중심으로 상업적 자립을 하게 되었다. 

 

1959년 서울대학교에 국악과가 최초 설립됨으로써 전통음악이 제도권 교육에 편입되었으며, 대중음악 또한 여러 사설 대학에서 학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서구지향적 성향의 음악적 보편성을 주장하는 남한의 양악인들은 순수 음악예술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민족음악의 독창성이나 특수성이 결여된 서구 모방주의 경향이나 문화 식민지 상황에서 벗어나야겠다는 노력이 필수적이다.

음악적 특수성을 고수하려는 과거지향적 성향의 국악인들은 음악의 보편성을 무시한 우물 안의 개구리식 국수주의나 복고주의적 사고로 인한 전통음악의 박제화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대중음악계의 주역들도 일시적 인기획득에만 연연할 것이 아니라, 양악인과 국악인의 시대적 당면과제에 주목하면서 음악제도권의 진입에 노력을 경주해야한다.

 

...(그러나 2020년 현재, 대중음악이 상업적으로나 인지도로나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마당에, 그들이 음악제도권 진입에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ㅋㅋㅋ차라리 '한국의 특색을 살린 케이팝 모색을 해야한다.' 정도가 현재로써 대중음악의 당면과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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